[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 89회] 남북한이 자의로 화해협력과 평화통일을 이루려는 민족사의 새로운 이정표였다
▲합의문 서명 앞두고 두손 맞잡은 남북정상 ⓒ사진공동취재단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ㆍ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라고 하여 '평화적 통일의 사명'을 명시하고 있다.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이란 구절은 민족통일을 동포애로써 실현한다는 의미다.
또 헌법 제66조 3항은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고 명문화했다. 대통령의 이념 성향에 따라 통일문제를 추진해도 되고 안 해도 괜찮은 선택의 과제가 아닌 필수적 의무에 속한다. 이것이 헌법정신이고 헌법조항이다.
군사독재 정권이나 사이비 문민정부의 대통령들이 대북 강경노선을 취하면서 평화통일운동을 탄압한 것은 위헌이고, 대통령이 평화통일을 추진하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로써 탄핵감이다. 국민은 이 부분을 잊고 있었다. 헌법학자나 언론ㆍ지식인들의 책임이 적지 않다. 반세기 동안 반통일 세력이 권력을 오로지 해 온 까닭이다. 그러면서도 헌법 전문과 대통령 조항에서 이것을 명문화해 놓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에 속한다.
김대중은 이를 깨고자 했다. 그는 중견 정치인 시절부터 통일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가져왔고, 1971년 대통령후보 때에는 남북유엔동시가입, 4대국 보장론, 비정치분야 교류협력 등을 줄기차게 제시하면서 민족통일운동에 선구적인 역할을 해왔다.
정계은퇴 뒤에 설립한 아태평화재단은 통일연구를 위한 집념의 산물이었다. 분단상태에서는 온전한 민주주의도, 서민대중의 복지도 어렵다고 보았다. 남북 양쪽에서 야심가들이 분단을 배경으로 독재를 하게 된다고 내다봤다.
▲반갑게 서로에게 향하는 남북정상 ⓒ사진공동취재단
2000년 4월 10일 오전 10시, 서울과 평양에서는 6월 12일부터 14일까지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한다는 중대 뉴스가 발표되었다.
1972년 7월 4일 오전 10시 남북한 당국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한 공동성명 이래 28년 만의 일이었다. 그 때는 남북 정상의 대리인이 마련한 공동성명이었지만, 이번에는 남북정상회담을 알리는 초특급 뉴스였다.
2000년 6월 13일 10시 반경, 김대중 대통령을 태운 공군 1호기는 서울공항을 떠난지 1시간 여만에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아스팔트 활주로 위에는 환영행사를 위해 선홍색 카펫이 깔렸다. 활주로 중앙에는 북한군 의장대가 정렬하고 김정일 위원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환영 나온 한복차림의 여자들이 꽃술을 흔들리면서 열렬히 환호하였다.
▲양 정상이 북측 의장대의 사열을 받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김정일 위원장이 공항 환영식장에 직접 나온 것은 사전에 양측이 '조율'하지 않은 '돌발사건'이었다. 김정일은 김대중의 방북을 그만큼 비중있게 받아들이고 본인이 직접 공항에 마중나와 환영한 것이다.
두 사람은 나란히 북한군 의장대의 사열을 받았다. 이날 공항에는 북조선의 최고 수뇌부가 거의 대부분 환영행사장에 나왔다.
김대중은 준비해간 평양도착 성명을 천천히 읽었다.
"저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남녘동포의 뜻에 따라 민족의 평화 협력과 통일에 앞장서고자 평양에 왔습니다.… 남녘동포가 이번 회담에 거는 기대 만큼이나 북녘 동포 여러분의 기대 또한 크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꿈만 같던 남북 정상간의 만남이 이루어진 만큼 지금부터 차근차근 해결해 갈 것입니다…."
▲김대중-김정일 만나다 ⓒ 사진공동취재단
환영행사가 끝나고 김대중은 김정일과 의전용 링컨 컨티넨털 승용차에 올라 평양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숙소인 백화원 초대소로 향했다. 김정일은 승용차의 상석을 양보하는 등 깍듯이 예우했다. 연도에는 꽃술을 흔들며 60만 평양 시민들이 도열해 있었다. 김대중과 김정일은 57분 동안 차중에서 환영인파에 손을 흔들어 답례하면서 숙소에 이르렀다.
실질적인 '남북정상회담'은 이날 오후 3시에 숙소인 백화원 영빈관에서 열렸다. 남측에서 임동원, 황원탁, 이기호가, 북측에서는 김용순 아태위원장만 배석했다.
두 정상은 3시간 50분에 걸친 마라톤 회담 끝에 <남북공동선언>이 합의되었다. 회담기록문을 보면, 통일방안과 관련하여 두 정상간에 치열한 공방이 전개되었음을 알게 된다. 한반도의 전쟁 방지와 평화체제 수립, 서해교전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있었다. 남북정상회담에서 채택한 <남북공동선언>은 다음과 같다.
▲어깨 나란히 한 남북 정상 ⓒ사진공동취재단
남북공동선언(전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숭고한 뜻에 따라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평양에서 역사적인 상봉을 하였으며 정상회담을 가졌다.
남북 정상들은 분단 역사상 처음으로 열린 이번 상봉과 회담이 서로 이해를 증진시키고 남북 관계를 발전시키며 평화 통일을 실현하는 데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고 평가하고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1.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2.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3. 남과 북은 올해 8ㆍ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4. 남과 북은 경제 협력을 통하여 민족 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
5. 남과 북은 이상과 같은 합의 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빠른 시일안에 당국 사이의 대화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도록 정중히 초청하였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남북정상회담을 마친 김대중 대통령은 15일 성남 서울공항에서 가진 도착보고를 통해 공동선언문의 내용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문제에 대해 '강의'하듯이 상세히 설명했다.
▲기념촬영하는 남북정상 ⓒ사진공동취재단
다음은 정상회담 성과에 대한 김 대통령의 '해설'.
▲자주적 해결원칙, 연합제안 그리고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
자주적 해결원칙은 7ㆍ4남북공동성명에도 있었던 내용이다. 그러나 이후 아무 것도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제 원칙만 얘기해서는 안 되고 구체적인 것을 보여주는 회담이 돼야 한다고 북측을 설득했다. 연방제를 주장해오던 북한은 최근 중앙정부가 지방정부에 외교권과 군사권을 내놓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로 선회했다. 이는 우리의 통일방안인 남북연합안과 상통하는 점이 많다. 그래서 앞으로 양측 대표가 이 문제를 놓고 토론해 보자고 설득하여 합의했다. 이는 통일운동 사상 획기적인 계기였다.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 및 비전향 장기수 문제
공항에 나오면서 김정일 위원장에게 "8ㆍ15전까지 여러분이 말한 대로 한번 통 크게 하시오. 다른 문제는 내가 국민하고 상의해서 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래서 6월부터 적십자회담을 바로 가동하겠다고 하니까 김위원장도 좋다고 하여 합의했다.
▲경제협력
북한 경제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북한에 들어가서 철도를 깔고 전력 도로 항만 통신문제를 해결해주고 북한에 공단을 만들어 우리 기업이 진출하면 대한민국의 경제는 남한 내부만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의 경제로 확대될 것이다. 경의선만 이으면 물류 비용이 30% 절감된다. 북한 노동력은 대단히 우수하고 임금도 저렴하다. 이러한 교류 협력을 경제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전면적으로 하기로 확실히 합의했다. 실천을 위해 남북 당국자들이 구체적으로 일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방문
합의를 보는 데 힘들었다. 그러나 결국 김위원장은 우리와 합의된 시일 안에 (적절한 시기를 택해) 서울을 방문하겠다고 결심했다. 김위원장에게 "당신이 서울에 와야 세계 사람들이 남북관계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것을 믿을 것이다. 나만 가고 당신이 오지 않으면 일회성이라며 믿지 않을 것이다. 동방예의지국의 예의를 잘 지키는 사람이라면 나이가 10여세 위인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당신도 (서울에) 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다.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위원장이 평양에서 만나 두 손을 마주잡고 포옹을 하면서 만들어 낸 남북공동선언은 타의에 의해 분단되고 전쟁을 치른 '적대국' 남북한이 자의로 화해협력과 평화통일을 이루려는 민족사의 새로운 이정표였다.
클린턴 미국 대통령,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 모리 요시로 일본 총리,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이 일제히 김대중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축하해주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남북관계는 파탄되고 다시 냉전체제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