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안광획(정치비평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9차 전원회의 결정서 분석
-비평화적 통일 노선으로 전환했다?
-통일은 미루고 사회주의 건설에 집중한다?
새해 들어와 지난 연말 열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9차 전원회의에 대한 분석과 토론이 활발하다. 특히, 이번 전원회의 결정서의 남북관계 관련 의미와 2024년 남북관계 전망에 대한 의견들이 많다. 대체로 ‘대미, 대남 부문에서의 강대강 정면돌파 원칙 확고화, 기존 남측 정권과의 통일 논의 및 교류협력 방안의 파산 선언’으로 추려낼 수 있겠다.
“이제는 현실을 인정하고 남조선것들과의 관계를 보다 명백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를 《주적》으로 선포하고 외세와 야합하여 《정권붕괴》와 《흡수통일》의 기회만을 노리는 족속들을 화해와 통일의 상대로 여기는것은 더이상 우리가 범하지 말아야 할 착오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북남관계는 더이상 동족 관계, 동질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되였습니다. 이것이 오늘 북과 남의 관계를 보여주는 현주소라고 할수 있습니다.
결론은 현실을 랭철하게 보고 인정하면서 당중앙위원회 통일전선부를 비롯한 대남사업부문의 기구들을 정리, 개편하기 위한 대책을 세우며 근본적으로 투쟁원칙과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조선로동당 제8기 제9차전원회의 결정서」, <로동신문> 2023.12.31. 중)
이번 전원회의의 대남・통일 정책 부문의 북의 충격적인(?) ‘폭탄선언’을 우리는 어떻게 분석, 평가해야 할 것인가, 또 변화하는 정세와 조건에서 진보진영의 과제는 무엇인가? 본 글에서는 부족하게나마 이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비평화적 통일 노선으로 전환했다?
먼저, 전원회의를 통해 북이 평화통일 노선에서 비평화적 통일노선으로 뱡향을 전환했다는 주장에 대해 살펴보겠다. 이 주장은 북이 미국의 대북적대정책과 남녘의 반민족 예속적 태도로 평화통일은 불가능한 것으로 규정하고, 미제국주의와 남녘 숭미・반민족・반통일 세력과의 전쟁은 불가피한 것으로 본다고 판단한다. 그 결과 평화통일 노선에서 비평화적 통일노선(적대세력 도발 시 압도적 무력으로 적 궤멸 및 조국해방 전쟁을 통한 남반부 영토 평정)으로 북이 노선을 전환했다고 보는 견해이다.
얼핏 보면 설득력이 있는 주장으로 보인다. 2019년 조미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미국과 남녘의 대북 적대정책은 계속되었으며, 이에 맞서 북은 강대강 정면대결을 천명하며 핵무력 완성 및 고도화를 추진했다. 특히, 극도의 반북 노선을 앞세운 윤석열 정권이 들어서고 한-미-일 군사동맹 체제의 강화, ‘유엔사’의 ‘동북아판 나토화’, ‘한-미-일 군사훈련 빈도 증가 및 규모 확대’ 등이 이어지며 한반도 전쟁위기는 더욱 고조되었고, 작년(2023년)에는 전쟁위기를 막을 최소한의 안전장치인 9.19 군사합의마저 윤석열 정권이 북의 만리경-1호 발사를 핑계로 파기하면서 그야말로 조-미・남 관계는 일촉즉발, 살얼음판과 같은 위기 국면에 다다랐다. 말 그대로 ‘조선반도에서의 핵충돌위기는 각일각 가능성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시점에 관한 문제로 변해가’(「조선인민군 국방성 대변인 담화」(2023.12.17.) 참조)는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해당 주장은 몇 가지 부문에서 심각한 오류를 가지고 있다. 먼저, 북이 ‘비평화적 방식’의 통일을 실현하는 것은 ‘미국과 추종세력의 군사도발이 끝끝내 감행될 경우’라는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다는 점이다. 이는 거꾸로 생각해 보면 미국과 윤석열 정권이 북에 대한 무력 충돌을 감행하지 않는다면 북의 비평화적 통일방식이 현실화되지 않을 것이고, 남북 간 군사적 대치상황이 장기화될 것을 의미한다. 일명 ‘양국체제론’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양국체제’ 및 남북 대치 상황이 한동안 계속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익히 알려져 있듯이, 북은 2021년 8차 당대회에서 개정한 당 규약에서도 “조선로동당은 남조선에서 미제의 침략무력을 철거시키고 남조선에 대한 미국의 정치군사적지배를 종국적으로 청산하며 온갖 외세의 간섭을 철저히 배격하고 강력한 국방력으로 근원적인 군사적 위협들을 제압하여 조선반도의 안전과 평화적 환경을 수호하며 민족자주의 기치, 민족대단결의 기치를 높이 들고 조국의 평화통일을 앞당기고 민족의 공동번영을 이룩하기 위하여 투쟁한다.”라 명시했다. 해당 구절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한(조선)반도에서의 전쟁을 억제할 뿐 아니라, 외세의 간섭을 배격하고 민족의 자주평화통일을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천명한 것이다.
위의 당 규약 내용을 유추해 보면, 현재의 남북이 서로 대치하는 형국을 언제까지 그대로 방치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결국, 일각에서 제기되는 ‘비평화적 방식으로의 통일정책 전환’ 주장이나 ‘미국과 윤석열 정권이 전쟁도발을 일으키지 않을 시 남북 대치 및 양국체제 고착화’ 모두 북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아무리 최근 들어서 이 땅에서 전쟁위험성이 최고조에 달했다 하더라도 전면전이 100% 일어난다고 가정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다.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대규모 핵전쟁이 발생하는 최악의 상황에도 대비해야 할 필요는 있지만, 한편으로는 올해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충분한 노력을 벌여나가야 한다. 아직 한 해의 초반부이기도 하고, 각계각층이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상황 전개는 달라질 수 있다. 그렇기에 전면전이란 최악의 상황만을 기정사실화하고 거기에만 총력을 집중하는 것은 또 다른 편향이 아닐까.
통일은 미루고 사회주의 건설에 집중한다?
두 번째로, ‘평화통일 실현은 잠정적으로 미루고 사회주의 건설에 집중한다’는 주장이다. 북이 한반도 통일을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당면한 정세와 맞물려 조국통일 과업은 잠시 후순위로 두고, 사회주의 건설(경제개발 5개년 계획 핵심과업 관철)과 국방력 강화에 보다 집중하겠다는 것이 두 번째 주장의 골자이다.
하지만, 이 역시 또 다른 억측이다. 여태까지 북의 정책 수행에 있어서 우선순위는 따로 있지 않았다. ‘정치에서의 자주, 경제에서의 자립’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건설-‘국방에서의 자위’로 대표되는 국방력 강화-민족의 자주독립·평화통일 실현은 따로 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맞물려 함께 가는 투쟁과업이다. ‘정치-사상-경제-군사강국 건설을 통해 공화국 북반부의 민주기지를 튼튼히 꾸리고 적대세력을 타승하는’ 투쟁과 ‘조선 전역에서의 외세 간섭 배격과 민족대단결 및 평화통일을 앞당기는’ 투쟁은 떼어 놓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사회주의 강국 건설이 외세 배격 및 타승과 민족대단결 및 평화통일을 보장하고, 외세배격 및 타승이 민족대단결 및 평화통일과 사회주의 강국 건설을 추동하며, 민족대단결 및 평화통일이 세계 자주화와 사회주의 완전승리로 가는 중요한 과제이고 남북 교류협력을 통해 투쟁 국면을 더욱 유리하게 바꾸는 그런 개념이다.
이런 개념을 무시하고 ‘정책상에 있어 우선순위를 두어 정세 변화에 따라 어떤 때는 통일정책이 앞서고, 어떤 때는 사회주의 건설이 앞선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북의 노선과 의도를 오해한 것이자 언어도단일 것이다. 애초에 사회주의 건설-국방력 강화-민족대단결 및 평화통일이 각자 따로 노는 정책이 아니라 한 몸인 투쟁과업인데 이를 동떨어진 것처럼 나누고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 적절한 분석일까?
전원회의 결정서의 참된 의미
그렇다면 이번 전원회의 결정서를 어떻게 분석하고 평가해야 할까? 먼저, 미국과 윤석열 정권의 전쟁 도발 획책에 맞서 가장 강력한 수준으로의 전쟁 억제 방침을 내세웠다고 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전쟁을 도발할 시 가차 없이 파멸시키겠다’는 표현에서 적대세력의 전쟁도발 의지를 꺾어버리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다. 또한, 끝내 미국과 윤석열 정권이 전쟁을 도발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면 ‘비평화적 방식에 의한 통일방안(조국해방전쟁을 통한 남반부 영토 완정)’을 곧바로 수행할 것이며 그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해나가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이는 말뿐이 아닌 실천적인 선언인데, 이미 북은 적대세력의 도발 의지를 분쇄할 뿐 아니라 유사시 적대세력을 제압, 굴복시킬 수단도 가지고 있음을 공개적으로 과시해 왔다. 지난 수년간의 핵무력 완성 및 고도화와 수 차례의 인민군 및 민간무력 열병식에서의 무력시위가 좋은 사례이다. 특히 2022년의 핵무력 법제화와 잇따른 화성포-17, 18형 발사훈련, 작년 정찰위성 만리경-1호 발사성공은 전쟁억제 및 제압굴복 수단이 완벽하게 준비되고 실제 운용하고 있음을 대대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이와 같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북은 미국과 윤석열 정권에게 유사시 그들을 완벽하게 분쇄하고 제압, 굴복시킬 수 있음을 이번 전원회의 결정서에서 ‘비평화적 방식 통일방안’으로써 경고를 내렸다고 할 수 있다. 현재 미국과 윤석열 정권이 추진 중인 각종 전쟁도발(한-미-일 군사동맹 및 군사훈련, 핵전력 투입 등)에 대해 북이 모두 충분히 대응할 수 있으며, 만에 하나 미국과 윤석열 정권이 전쟁 도발이란 최악의 자충수를 둔다면 강력한 수단으로 일격에 타격하는 것은 물론 남녘에 대한 해방, 미국 본토 타격까지 수행하겠다는 선언이다. 이는 최근의 ‘전쟁이 발발하면 국지전은 없으며, 어떤 결과든 북의 선제적이고 자비 없는 대응을 통해 적대세력의 참담한 패배로 이어질 것’이란 표현이 잘 보여준다.
두 번째로, 북은 전원회의를 통해 그동안의 남북관계와 통일정책 전반을 총화하고 통일 정책에 있어 새로운 원칙과 기준을 천명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앞서 인용한 원문에서 “정권붕괴와 흡수통일의 기회만을 노리는 세력과의 평화통일을 논의하는 것은 착오”, “북남관계는 동족, 동질관계가 아닌 가장 적대적인 교전국 관계로 고착화되었다”는 표현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해당 표현의 본질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현재 전쟁위기가 고조된 상황은 물론이고 전쟁위기가 해소되고 평시로 돌아가더라도 이전과 같은 방식의 남녘과의 통일 논의나 교류협력으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뜻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국힘-민주 정권 여부와 상관없이 미국의 동북아 패권 전략에 복종하며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에 의거한 흡수통일’ 정책(이른바 ‘남북연합제’, 「국가보안법」, 「남북교류협력법」)을 고수하는 현재의 남녘 정권과는 전시・평시 구분 없이 그 어떠한 통일 논의도, 교류협력도 없다는 뜻이다.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에 의거한 흡수통일’ 정책을 폐기하고 상호존중을 바탕으로 한 통일전략으로 바꾸는 것과 같은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만 남북 간 통일 논의와 교류협력이 고려될 수 있을 것이고, 이것이 바로 북이 전원회의를 통해 새롭게 정의한 통일 정책의 원칙과 기준이다.
마치며 - 우리의 과제
종합하자면, 북의 전원회의 결정은 가장 강력한 표현과 실제 수단을 동원하여 미국과 윤석열 정권의 전쟁 도발을 근본적으로 분쇄하고, 남녘의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에 의거한 흡수통일’ 정책에 본질적 타격을 가하고 통일정책의 새로운 기준과 원칙을 마련한 것이다. 7차 당대회에서 선언한 바와 같이 ‘통일의 대통로’를 주도적으로 열어나갈 것을 대내외적으로 선언한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올 한해 어떻게 투쟁해야 할까? 당면한 과제로는 한반도에 전쟁이란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광범위한 반전평화, 반미자주 투쟁을 벌여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기존의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에 의거한 흡수통일’ 정책을 완전히 폐기시키고 상호존중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통일 정책으로 바꾸는 노력을 벌여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