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 1910년 9월 13일 독립운동가 이재명 사형

“나라를 강탈한 외적의 수괴가 이토 히로부미라면, 나라를 판 내적의 수괴는 이완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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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노 이완용(왼쪽). 서울대 규장각이 보관하고 있는 을사조약 문서 사본. 외교문서 요건상 필요한 핵심서명 등이 빠져있는 부분을 원으로 표시했다. <한겨레> 자료 사진.

  대한제국의 관료였던 이완용은 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맺은 ‘을사조약’ 체결 과정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했다. 이완용은 ‘을사조약’ 체결에 공을 세운 대가로 이토의 추천을 받아 총리대신의 자리까지 오른다. 이완용의 거듭된 변절과 매국행위를 발판 삼아 일본은 한국에 대한 내정간섭을 본격화한다.
  제국주의 침략으로 조국이 위기에 빠지자, 국민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수많은 의사·열사들이 ‘침략자와 불의에 대해 목숨 걸고 저항’하며 항일 구국 운동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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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의사. 사진 출처 <국가보훈처>

  108년 전 오늘 1910년 9월13일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이재명 의사가 순국한 날이다. 이 의사는 국적 이완용을 처단하고자 의거에 나섰다가 미수에 그친 뒤 현행범으로 잡혔다. 이 의사는 결국 교수형에 처해졌지만, 그의 의협심은 친일 매국노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일제에는 두려움을 안겼다.

이완용 습격 당일

  “총리대신 이완용, 명동성당 앞에서 이재명에게 피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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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의사의 이완용 습격사건을 보도한<신한민보>. 1909년 12월29일 치.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난 이재명은 17살 때인 1904년, 노동 이민으로 하와이를 거쳐 미국으로 갔다. 그러던 중 고국에서 한일협약과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 소식을 듣게 된다. 조국의 국권 회복을 위해 1907년 귀국한 이재명은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을 처단하기로 결심한다. 이재명은 뜻을 같이 할 동지를 모으며 기회를 기다렸다. 계획을 진행하던 중인 1909년 10월26일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다. 안중근의 거사로 국내외에는 긴장 분위기가 흐른다.
  더 이상 이완용의 처단을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한 이재명은 동지들과 함께 거사를 위한 구체적인 준비에 들어간다. 그러는 사이 1909년 12월22일 명동성당에서 열리는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이완용 등 매국노들이 참석한다는 신문 보도가 났다. 기회가 예상보다 빨리 찾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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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이 습격당한 명동성당 일대 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1909년 12월22일 이재명과 동지들은 학생으로 변장하고 이날 새벽부터 성당 부근에 대기했다. 마침내 오전 11시30분께 이완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완용은 추도식장인 성당에서 나와 인력거에 올랐다. 그 순간 이재명은 감추었던 칼을 뽑아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때 인력거꾼이 앞을 가로막자 이재명은 그를 베고 곧바로 인력거에 올라탔다. 이완용의 어깨를 단도로 찔렀고 이완용이 인력거 밑으로 굴러떨어지자, 그의 위에서 여러 차례 찔렀다. 세 곳에 상처를 입은 이완용은 혼수상태에 빠져 병원으로 실려 갔다.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한 이재명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재명은 곧바로 이완용을 경호하던 한국인과 일본인 순사에게 체포되었다.
  이완용의 상처는 예상외로 깊었다
  이재명이 휘두른 세 번의 칼끝은 이완용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특히 왼쪽 어깨로 들어간 첫 번째 칼은 이완용의 폐를 관통했다. 숨을 쉴 때마다 공기가 새어 나와 폐기종을 일으킬 징후까지 보였다. 출혈이 심하고 맥박까지 불규칙해 거의 반죽음 상태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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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의 습격을 당한 이완용의 상태를 보도한 <신한민보>. 1910년 2월9일 치.

  하지만 이완용은 일본의 보호 아래 당시로서는 최고 수준의 치료와 대수술을 받았다. 이완용이 받은 수술은 한국의 흉부외과 수술 1호이기도 했다. 그를 수술한 의사는 “외과 기술이 10년만 늦었어도 이완용은 이날 죽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비록 이완용은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지만 죽는 날까지 폐렴으로 고통을 받아야 했다. 이날 입은 상처는 이로부터 17년 뒤인 1926년, 이완용의 죽음에 원인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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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한겨레> 자료 사진.

  입원 53일 만인 1910년 2월14일에 퇴원한 이완용은 일본 순사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충남 온양에서 온천욕과 천렵으로 요양한다. 이완용이 피습당한 뒤 순종과 고종은 거액의 위로금과 함께 하루도 빠짐없이 시종을 보내 문안을 물었다. 아울러 일본에서도 고위 관료들이 줄지어 병원을 찾아 위로금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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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의 한일합방조약 뒤 퇴위하는 고종을 위협하며 서울시내를 행군하는 일본군의 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한 달 뒤 총리대신으로 복직한 이완용은 8월22일 “한국 전체에 대한 통치권을 완전히 그리고 영구적으로 일본에 넘겨 준다”는 한일합방조약에 도장을 찍는다. 그리고 4일 뒤인 8월26일 순종 황제로부터 대한제국 최고 훈장인 금척대수훈장을 받는다. 나라를 팔아넘긴 ‘공로’의 의미였다.

“이 야만 섬나라의 무식한 놈아!” 재판장에게 소리친 이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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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국권침탈 조약 원본문서 을사조약 국문 앞면. <한겨레> 자료 사진.

  이재명은 이완용을 습격한 직후 일본 순사에 붙잡혀 이완용의 집으로 끌려왔다. 이때 이완용과 함께 을사조약 체결에 앞장선 농부대신 조중웅이 이재명을 보자 소리쳤다. “네가 흉한이냐” 그러자 이재명은 눈을 부릅뜨고 “너 따위 역적 놈이 감히 나에게 너라고 하느냐”하고 호통으로 맞받았다. 일본 순사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도 이재명은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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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총리대신 리완용 모살미수사건기록. 자료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이런 이재명의 정신은 이후 이어진 재판 과정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이재명과 동지 12명은 이완용 습격 사건의 피의자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았다. 그의 첫 재판은 1910년 5월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렸다. 그런데 재판 과정에서 일본인 재판장인 쓰가하라가 갑자기 이재명의 진술을 중단시키는 일이 일어난다.

재판장 : 순사가 경호하는 데도 네가 목적한 뜻을 수행하여 이완용이 죽었다고 알았는가 .
이재명 : 나는 그의 생사를 알지 못하고 잡혔다 .
재판장 : 너는 권총을 지녔는가 .
이재명 : 가졌다 .
재판장 : 다수의 공모자가 있었는가 .
이재명 : 나 혼자다 .
재판장 : 왜 이완용을 살해하려고 했는가 .
이재명 : 이완용을 죽일 죄목은 허다하나 대략 8 개조를 설명될 수 있다 . 첫째 , 을사조약을 ...

  일본인 재판장은 이재명의 입을 통해 밝혀질 자신들의 죄목이 폭로될까 두려워했다. 당시 재판정에는 내외신 기자를 포함한 방청객들도 자리했기 때문이었다. 이재명은 9개월 여간 이어진 재판 내내 이완용의 죄목을 공개적으로 밝히려 애썼다. 이재명이 제시한 이완용의 죄목 8개조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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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29일 이완용이 통감 데라우치에게 순종 황제의 통치권 양여에 관한 칙유안을 빨리 승인해달라고 요청한 조회 문서. 급한 용무라는 뜻의 ‘지급’이란 빨간 글자가 찍혀 있다. 황제의 조약거부로 다급해진 일제와 이완용이 일방적으로 조약 절차를 추진했음을 짐작하게 하는 사료다. <한겨레> 자료 사진.

① 을사조약 체결로 인해 외교권을 일본에 넘긴 일과 조선통감부를 우리나라에 설치케 한 일 .
② 헤이그특사로 인하여 황제 앞에 3 차에 걸쳐 협박하여 양위케 한 일 .
③ 정미칠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일과 또한 군대를 강제로 해산케 한 일 .
④ 어린 황태자 ( 리은 ) 를 일본에 인질로 보내고 또한 일본여자와 정책적인 결혼을 시킨 일 .
⑤ 고종을 일본에 건너가게 획책한 일 .
⑥ 황제를 강제로 서북지방을 순행케 한 일 .
⑦ 사법권을 일제에 넘겨 애국지사를 처벌케 한 일 .
⑧ 표면적으로는 일진회로 하여금 한일 합병케하기 위하여 100 만인 서명운동을 전개시켜 합병케 한 일 .

  재판 과정에서 보여준 이재명의 의협심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재명은 재판장을 향해 호통치면서도 동지들을 위해서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돌리는 모습을 보였다. 이재명의 진술에 따라 방청객은 숙연해지기도 했고, 때로는 박수도 쏟아져 나왔다.

재판장 : 피고와 같이 흉행한 사람이 몇 명이냐 .
이재명 : 이 야만 섬나라의 무식한 놈아 ! 너는 흉 ( 兇 ) 자만 알지 의 ( 義 ) 자는 모르느냐 . 나는 강도와 같은 너희들을 몰아내 내 조국을 구하기 위하여 네놈들의 앞잡이를 처단하려는 의행 ( 義行 ) 을 한 것이다 .
재판장 : 피고의 일에 찬성한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 .
이재명 : 2 천만 대한민국 모두이다 ! 야만 왜종들은 퇴청시키고 재판정 창밖에 나열한 한국인을 모두 입장시켜라 . 그렇지 않으면 나는 너의 심문에 대답하지 않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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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불공정한 공판 과정을 보도한 <신한민보>. 1910년 6월15일 치.

  이런 상황에서 이재명의 법정투쟁은 일본의 불공정한 재판 과정과의 외로운 싸움이기도 했다. 일본은 안병찬 변호사 등의 성의 있는 변론도 외면하고 1910년 5월18일 이재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재명은 이 자리에서 일본 재판장을 향해 “너희 법이 불공평하여 나의 생명을 빼앗지만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를 교수형에 처한다면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너희 일본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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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의사의 순국을 보도한 <신한민보> 1910년 10월26일 치.

  결국 이 말을 마지막으로 이재명은 의거 9개월여 만인 1910년 9월13일 수감 중이던 서대문형무소에서 죽음을 맞아야 했다. 그의 나이 23살이었다.

2천만의 이재명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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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초, 이완용과 맺은 한일합방조약으로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한성으로 부임하는 광경. <한겨레> 자료 사진.

  이재명이 수감 중에도 가장 우려한 일은 바로 일제에 의한 합병이었다. 그러나 앞서 밝혔듯, 습격 뒤 요양을 끝내고 총리대신으로 복직한 이완용이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한일합방조약에 도장을 찍는 것’이었다. 수감 중 망국의 소식을 전해 들어야 했던 이재명의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참혹했을 것이다.
  결국 이재명 의사가 순국하기 보름 전인 1910년 8월29일 본격적인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조선인들에 대한 일본의 차별정책과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도 더욱 거세졌다.
  하지만 독립을 향한 조선인들의 열망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일제의 주요 인물을 처단하는 독립투사들의 투쟁도 계속되었다. 심지어 일제 침략세력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운동의 방식으로 자결과 순국이 자리 잡기도 했다. 2천만 국민들의 독립의지는 광복을 맞은 1945년 8월15일까지 36년 동안 꾸준히 지속되었다. 이재명 의사의 마지막 유언인 ‘2천만 이재명 의사’는 결코 그의 유언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참고문헌
<이완용 평전 > 김윤희
<이완용을 찌른 의열장부 이재명 > 김삼웅 성균관대 교수
<국사관논총 >제 32집 - 근대 대한제국의 종말과 의병항쟁
<신편한국사 > 43권 - 이재명의 이완용 척살 미수
<신한민보 > 1909년 12월 29일 , 1910년 2월 9일 , 1910년 6월 15일 , 1910년 10월 26일 치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 총리대신 이완용 모살 미수사건기록

강민진 기자